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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논문




제3장 하나회 인맥의 형성


제1절 하나회의 뿌리

1980년대 전반기의 한국정치를 좌지우지한 정치세력은 전두환의 '하나회' 인맥이다. 1963년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기생들이 주축이 되어 비밀리에 결성한 하나회(일명 一心會)는 제5공화국 창출의 모태가 됨으로써 현대 한국정치사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 오성회

하나회의 뿌리는 전두환이 육사생도 시절에 결성한 오성회(五星會)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성회는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김복동(金復東), 최성택(崔性澤), 백운택(白雲澤)의 다섯 사람이 장래 장군이 되기를 꿈꾸며 만든 20세 청년들의 친목써클이었다. 최성택의 회고에 따르면 오성회는 단순한 친목써클이었다.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전두환(대구공고), 노태우.김복동(경북고), 박모씨(박병하: 인용자 주), 그리고 경남고를 나온 저는 같은 경상도 출신이고 해서 쉽게 어울려 친하게 되었죠(박씨는 사정상 나중에 12기로 임관해 그룹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외출해 같이 술 마시며 토론도 하고 방학 때면 대구, 김해 등 서로의 집에 놀러가 부모님께 인사드리면서 형제처럼 지냈어요. 스무살 팔팔할 때라 장군을 꿈꾸며 오성회라는 써클을 만들었죠. 각자 마음에 드는 걸 하나씩 골라 용성(勇星, 전두환).관성(冠星, 노태우).여성(黎星, 김복동).혜성(慧星, 최성택) 등 별명을 지어 부르기도 했어요. 3학년 때 합류한 백운택씨는 웅성(雄星)이라고 불렀죠. 하나회는 나중에 목적의식을 가지고 만들었지만 오성회는 단순한 친목모임이었어요. '조국을 위해 일을 하려면 끊을 수 없는 유대를 가져야 한다'는 20세 청년들의 우정써클이었죠."

1955년 오성회의 다섯 사람은 소위(少尉) 계급장을 달고 전방 소대장으로 흩어졌지만 서로의 유대는 변하지 않았다. 그 후 오성회는 회원이 늘어나 칠성회(七星會)로 확대되었고, 이후 이른바 육사 11기 텐 멤버(ten member)로 발전했다.

텐 멤버의 성원들은 엘리트 의식이 대단히 강했고 선배 장교들에 대한 불만이 매우 높았는데, 이것이 하나회를 결성한 동기 중의 하나가 되었다. 텐 멤버의 성원들은 육사 10기 이전의 선배 장교들이 단지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의 군사교육만 받고 군의 요직을 두루 차지하고 있는 데 반해 자신들은 정규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들임에도 불구하고 인사적체현상으로 인해 진급이 더디어지고 있는 데 대한 불만이 매우 많았다. 하나회 회원의 한 사람은 당시 상황에 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정규 4년제인 육사 1기를 뽑는다고 해 놓고선 막상 졸업할 때는 11기 딱지를 붙여 내놓는 거예요. 2.3.4기도 마찬가지로 12.13.14기가 돼 버린 거죠. 그거야 그렇다 하더라도 6개월짜리 교육밖에 받지 않은 선배들이 우리를 시기하고 못살게 구는데 화가 나더라고요. 전방생활을 하는데 선배들의 질시와 견제가 참 심했어요. 그래서 '우리끼리 뭉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정규 육사 동창회인 '북극성회'가 있긴 했지만 해가 바뀔수록 숫자는 늘어 덩치만 컸을 뿐 통솔이 잘 안되고 조직력이 형편없었어요. 그래서 육사시절부터 축구, 럭비, 송구 등 운동부원들의 신망을 받던 축구부 주장 전(全)씨를 중심으로 소수정예조직이 필요하다는 얘기들이 나왔지요."

이와 같이 하나회가 결성된 동기에는 선배 장교들에 대항해 정규 육사생들끼리 단합함으로써 자신들의 배타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생각이 깊게 깔려 있었다. 물론 군과 같이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위계질서가 강조되는 사회에서 선배 장교들에게 대항하는 조직이 생겨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하나회의 배후에 박정희(朴正熙)라는 막강한 후견세력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 박정희와 전두환의 호혜적 관계

박정희는 1961년 5.16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후 군부 내에서 육사 8기생들의 세력이 커지자 이를 견제할 목적으로 육사 11기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회 세력을 적극 비호, 육성하였다. 박정희는 이들에게 보직과 진급에서 특별한 배려를 베풀었으며, 그 대가로 전두환 그룹은 박정희에게 절대적 지지와 충성을 바쳤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유대관계는 1961년 5.16 당시부터 시작되었다. 전두환은 5월 18일 약 1,000여명의 육사생도들을 모아 광화문과 시청 등지에서 5.16 지지 시위를 벌임으로써 5.16쿠데타가 성공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얼마전 공개된 이낙선(李洛善) 메모에는 당시 상황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당시 동숭동의 서울대 문리대 ROTC 교관 신분이었던 전두환은 이 날 아침 쿠데타 소식이 전해진 지 불과 몇 시간만인 오전 8시에 육사 동창회 서울지부장을 맡고 있던 이동남(李東南) 대위와 함께 육군본부로 찾아가 쿠데타 주체세력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순발력을 보였다. 이 날 밤 전두환은 수집된 정보를 취합한 결과 주체세력이 예전부터 손영길(孫永吉) 대위를 통해 잘 알고 있던 박정희 장군임을 알게 되자 적극 지지하기로 하였다. 5월 17일 전두환은 육사동창회 간부장교들과 함께 독신장교 숙소에 모인 자리에서 "5.16 지지 데모를 벌임으로써 사실상 이번 거사가 거군적(擧軍的)으로 성공했음을 보이자"고 주장하고, 이상훈(李相薰) 대위가 준비한 시가행진 코스, 시간, 구호, 결의문 등을 채택하였다. 당시 육사교장이었던 강영훈(姜英勳)은 육사생도들의 시위를 반대하다가, 5월 17일 밤 혁명위 본부에서 박정희, 장도영(張都暎) 등이 입회한 가운데 전두환과 대질신문을 벌이는 과정에서 '반혁명분자'로 몰려 즉각 체포되었다. 5월 18일 오전 9시경 약 800명의 육사생도와 200명의 육사졸업생들이 모여 "동대문-광화문-남대문-동화백화점-반도호텔-시청앞" 코스를 따라 시가행진을 벌임으로써, 국민들에게 박정희의 5.16쿠데타가 거군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이 시위를 성공적으로 이끈 데 대한 보답으로 전두환은 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으로 발탁되었다. 이 때부터 전두환은 박정희를 가까운 거리에서 보필하며 충성을 바쳤고 그 대가로 특별한 배려를 받는 호혜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 때 형성된 박정희와 전두환의 후견인-수혜자 관계는 1979년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1963년 7월 6일 전두환, 노태우 등의 육사 11기 그룹은 김종필(金鍾泌)을 포함한 공화당 요인 40여명을 제거함으로써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정치기반을 굳히려는 친위쿠데타를 기도하였다. 비록 불발로 끝나기는 하였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전두환 그룹과 박정희의 유대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5.16 직후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박정희는 자신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는 전두환 그룹을 특별히 아끼고 배려하였다. 하나의 사례로 1963년 민정이양 당시 박정희는 전두환에게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했으나, 전두환은 이를 사양했다고 한다. 전두환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내가 옛날에 박정희 대통령이 최고회의 의장 할 때, 나보고 국회의원 나가라고 하는 것 안 나갔어요. 장도영 사건도 끝나고 얼마 안됐을 때였는데, 사무실에 오라고 해서 갔었어요. 나보고 '전(全) 대위, 국회의원 출마 안하겠나'고 그래. 내가 깜짝 놀라 '제가 어떻게 국회의원을 합니까' 하니, '하면 하는 거지 왜 못해'라고 해. '아닙니다. 저는 군대에 있는 게 좋습니다... 돈도 없고,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는데, 그 때부터 박 대통령이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보는 거야... 내가 끝까지 국회의원 출마를 거절한 게 인상적이었던 것 같고, 참신한 육사 출신으로 본 것 같애."

전두환은 박정희의 특별 배려로 19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직을 맡았으며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도 근무하였다. 군과 같은 위계적 조직에서 인사관련부서는 요직 중에서도 요직에 속한다. 전두환은 방대하고도 세밀한 인사자료들을 확보함으로써 하나회 결성에 참여할 후배 장교들을 엄선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군 내 비밀사조직인 하나회가 결성될 수 있었던 것은 아래로는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의 엘리트 의식과 선배 장교들에 대한 불만 등의 공통된 요구가 있었고, 위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배려와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2절 하나회의 결성과 확대


(1) 하나회의 결성

1963년 하나회 결성작업은 철저한 보안 속에서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인선작업은 전두환, 노태우, 권익현 등 육사 11기가 주축이 되고 13, 14기 후배들이 뒷받침했다. 선발기준은 한수(漢水) 이남 출신으로서 충성심이 강하고 의리가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각 기당 10명 내지 12명으로 정했다. 조직의 명칭은 '태양을 위하고 조국을 위하는 하나같은 마음'이라는 뜻에서 '하나회'(일명 一心會)라고 정했다. 하나회는 초기에 김태환회(金泰煥會)라고도 불렸는데, 이 이름은 김복동, 노태우, 전두환의 이름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온 것이라고 한다. 하나회의 회장은 전두환이 맡았다. 김복동은 전두환과 하나회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다가 패하여 이후 하나회에서 멀어졌다. 조직의 결성방식은 육사 11기 텐 멤버를 본따 각 기별로 텐 멤버를 조직하고 이를 종적으로 통합하여 총100여명을 망라한 단일조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당시 군부 내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육사 8기생들의 힘을 견제하고 박정희의 지지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경상도 출신을 70-80%나 선발한 반면 이북 출신은 배제하였다.

하나회는 단순한 친목단체에 불과했던 것이 아니라 엄격한 규율과 보안을 강조하는 비밀조직이었다. 입회시에는 반드시 엄격한 자격심사와 복잡한 가입절차를 거쳐야 했다. 육사 11기에서 먼저 각 기별로 최초의 회원 한 명을 선정해서 만장일치로 가입결정을 내리면, 다음부터는 이 한 명을 중심으로 동기생들끼리 텐 멤버를 구성했는데, 이 경우 신입회원은 11기 선배들뿐만 아니라 동기들로부터도 만장일치의 동의를 얻어야만 가입될 수 있었고, 만약 한 명이라도 반대자가 있으면 가입될 수 없었다. 가입대상자로 일단 물망에 오른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격, 가족관계, 교우관계, 졸업성적, 건강상태, 사생활 등에 관해 철저한 뒷조사를 받게 되는데, 이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면 가입권유를 받을 수 있었다. 가입권유를 받은 사람은 이를 '최대의 영예'로 생각하고 흔쾌히 받아들였으며, 거절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입회식에서는 목숨을 걸고 조직의 비밀을 지키며 명령에 절대 복종할 것을 서약했다. 하나회 회원의 한 사람은 입회식 당시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약속한 시간에 11기 선배의 어느 집에 가면 11기 전체 회원이 마루나 다다미방 같은 곳에서 일렬로 앉아 있습니다. 그 한가운데에는 회장(전두환)이 앉아 있지요. 반드시 혼자 가서 무릎을 꿇고는 '국가와 조직에 충성한다'는 내용의 선서를 합니다. 선서가 끝나면 11기 중의 한 명이 붉은 포도주를 한 잔 따라 줍니다. 두 손으로 그 잔을 받아 마시면 그걸로 하나회 회원이 되는 겁니다."

하나회는 이러한 방법으로 비밀리에 조직원을 모집하여 <표 3-1>과 같이 육사 11기에서 20기까지 총120여명에 이르는 회원을 확보하였다.

[ 표 3-1 ] 하나회 회원 명단 (육사 11-20기)

육사 11기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정호용(鄭鎬溶), 김복동(金復東), 권익현(權翊鉉), 최성택(崔性澤), 백운택(白雲澤), 손영길(孫永吉), 안교덕(安敎德), 노정기(盧正基), 박갑룡(朴甲龍), 남중수(南仲守)
육사 12기 박준병(朴俊炳), 박희도(朴熙道), 박세직(朴世直), 안필준(安弼濬), 정동철(鄭東喆), 장기오(張基梧), 황인수(黃仁秀), 최 웅(崔 雄), 김홍진, 이광근, 임인식
육사 13기 최세창(崔世昌), 오한구(吳漢九), 정동호(鄭東鎬), 신재기(辛再基), 윤태균(尹泰均), 이우재(李祐在), 황진기(黃鎭祺), 조명기(趙明紀), 최문규(崔文奎), 우경윤(禹慶允), 권영휘(權榮暉), 박종남(朴鍾南), 정진태(鄭鎭泰
육사 14기 이종구(李鍾九), 이춘구(李春九), 안무혁(安武赫), 배명국(裵命國), 정도영(鄭棹永), 박정기(朴正基), 장기하(張基夏), 신우식(申佑湜), 장홍열(張洪烈), 이철희(李哲熙), 이경종(李暻鍾), 신쌍호, 문영일, 최종국, 김충욱
육사 15기 이진삼(李鎭三), 민병돈(閔丙敦), 고명승(高明昇), 김상구(金相球), 이대희(李大熙), 나중배(羅重培), 권병식(權丙植), 강자화(姜資和), 이한종(李漢鍾), 이상수(李相秀), 박태진(朴泰珍), 김중영
육사 16기 장세동(張世東), 신말업(申末業), 정순덕(鄭順德), 최평욱(崔坪旭), 송응섭(宋膺燮), 정만길(丁萬吉), 김정룡(金正龍), 이필섭(李弼燮), 양현두, 최원규, 이지윤, 김충식
육사 17기 김진영(金振永), 안현태(安賢泰), 허화평(許和平), 허삼수(許三守), 이현우(李賢雨), 이문석(李文錫), 류근하(柳根夏), 김근준(金根俊), 임인조(林寅造), 김태섭, 이병태, 이해룡, 강명오
육사 18기 이학봉(李鶴捧), 구창회(具昌會), 정태화(鄭泰和), 조남풍(趙南豊), 성환옥(成煥玉), 김정헌(金正憲), 김재창(金在昌), 이시용, 배대웅, 심준석, 이승남
육사 19기 서완수(徐完秀), 김진선(金鎭渲), 노석호(盧錫鎬), 최석림(崔錫林), 장석규(張錫奎), 김상준(金相駿), 최윤식, 김택수, 김학주, 최준식, 이택형, 김정환, 최부웅, 최윤수
육사 20기 안병호(安秉浩), 허청일(許淸一), 김무웅(金武雄), 김종배, 김길부, 이현부, 함덕선, 장호경, 안광열

(이상 122명)

(2) 자리 물리기

하나회 회원들은 이른바 '자리 물리기' 방식으로 군 요직을 두루 장악함으로써 군부의 실세로 떠올랐다. 대표적인 사례로 청와대 경비를 맡았던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 자리를 꼽을 수 있다. 이 자리는 처음에 박정희의 전속부관인 손영길(육사 11기)이 맡고 있다가 1967년 육군대학을 가게 되면서 전두환에게 넘겨 주었고, 1969년 전두환이 물러가면서 다시 박갑룡(11기)에게 넘겨 주었고, 그 후임으로 이종구(14기), 고명승(15기), 장세동(16기), 김진영(17기) 등 계속해서 자리 물리기가 되풀이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하나회 회원들이었다. 하나회 회원들의 자리 물리기 관행은 1980년대에 들어와 더욱 심해졌다. <표 3-2>와 <표 3-3>과 같이 역대 수도방위사령부 30단장과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은 대부분 하나회 출신 장교들이 차지하였다.

[ 표 3-2 ] 역대 수도방위사령부 30단장

성명 재임기간 육사 하나회
이현우 80년 1월-81년 12월  
김상준 81년 12월-82년 12월 17기
김충석 82년 12월-84년 12월 19기  
길영철 84년 12월-86년 12월 23기
안광찬 86년 12월-88년 12월 25기
김부명 88년 12월-90년 12월 29기  
박항규 90년 12월-93년 5월  


[ 표 3-3 ] 역대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성명 재임기간 육사 하나회
박준병 81년 5월-81년 7월 12기
김응열 81년 7월-82년 1월    
안필준 82년 1월-83년 1월 12기
정동호 83년 1월-83년 12월 13기
박명철 83년 12월-84년 7월    
고명승 84년 7월-85년 5월 15기
이대희 85년 5월-86년 6월 15기
최평욱 86년 6월-87년 6월 16기
임인조 87년 6월-87년 12월 17기
이현우 87년 12월-88년 2월 17기
구창회 88년 2월-89년 4월 18기
장석린 89년 4월-90년 6월    
김진선 90년 6월-90년 10월 19기
안병호 90년 10월-91년 12월 20기
최승우 91년 12월-93년 4월


하나회 회원들은 정치권력과 다소 거리가 있는 야전군 사령관으로 근무하기보다 정치권력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는 육군본부, 수도경비사, 공수특전단, 육군참모총장실, 대통령 경호실, 중앙정보부, 보안사 등에서 주로 근무하였다. 일선에서 근무한 경력이 필요한 경우에도 이들은 서울 근방의 1사단이나 9사단에서 단기간 복무한 뒤 곧바로 후방으로 복귀하였다.

[ 표 3-4 ] 하나회 소속 육군본부 근무자 명단

육사 이름 직위
11기 전두환 인사참모부
12기 박준병
안필준
황인수
인사운영감, 인사참모부장
인사운영감, 인사참모부장
정보참모부장
13기 정동호
윤태균
최문규
인사참모부장
정보참모부장
작전참모부장
15기 이대희
나중배
민병돈
인사운영감, 인사참모부장
정책기획실장
정보참모
16기 정만길 작전참모부장
18기 구창회
성환옥
인사참모
헌병감
19기 김진선 인사참모
20기 안병호 인사참모


이들이 가장 많이 근무한 곳은 육군본부였다. <표 3-4>와 같이 1963년 전두환이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근무한 것을 시발로, 12기의 박준병, 안필준, 황인수, 13기의 정동호, 윤태균, 최문규 등 하나회 후배들은 계속해서 육군본부에서 근무하였다. 이들은 임기를 마치면 그 후임자로 11기 선배들의 동의를 얻어 하나회 동기나 후배들을 추천하는 방식으로 자리물림을 계속하여 군부의 요직을 독차지하였다. 그 결과 이들은 대부분 비슷한 군 경력을 가지게 되었다. <표 3-5>와 같이 전두환과 노태우의 군 경력은 매우 유사하다.

[ 표 3-5 ] 주요 군 경력 비교

전두환 (全斗煥) 노태우 (盧泰愚)
1955 육사 11기 졸업 1955 육사 11기 졸업
1960 미 보병학교 수료 1959 미 특수전학교 수료
1963 하나회 창립 멤버 1963 하나회 창립 멤버
1965 육군대학 졸업 1968 육군대학 졸업
1966 공수특전단 부단장 1974 공수특전 여단장
1967 수경사 30대대장 1978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1976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1979 수경사령관
1979 보안사령관 1980 보안사령관
1980 대장으로 예편 1981 대장으로 예편


하나회 회원들은 군과 국가에 대한 충성보다 조직에 대한 충성을 앞세웠으며, 군의 공식적 지휘나 통제보다 조직의 결정사항을 우선시하였다. 그 대가로 이들은 각종 진급과 보직에서 특별한 배려와 혜택을 받았으며, 심지어 중대한 잘못을 범한 경우에도 문책을 당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비하나회 출신의 한 대령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인사문제를 떠나더라도 하나회 출신 장교가 운영하는 부대에서 사고가 생겼을 때 처리하는 관행을 보면 특혜라는 점이 잘 드러난다. 70년대초 이종구씨가 전방부대 대대장으로 있을 때 부대에서 10여명이 사상하는 총기사고가 있었지만 책임자인 그는 무사했다. 박준병씨가 20사단장 때 훈련 중 6명이 죽었고, 최평욱씨가 사단장일 때 예하부대에서 월북사고가 일어났지만 역시 무사했다. 비하나회 출신 장교가 지휘관이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하나회에서 전두환은 특별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동기나 후배들이 진급하거나 보직을 받아 멀리 떠날 때면 반드시 기억될 만한 술자리를 벌이고 격려해 주었다. 그는 회장으로서 다른 동기생들을 친구가 아닌 부하로 대하였다. 마찬가지로 동기생들도 그를 친구가 아닌 상관으로 대하였다.

하나회 회원들은 자기들끼리는 공식적 직위나 계급을 부르지 않고 '형님' 또는 '아우'라고 불렀으며, 특별히 11기 선배들에 대해서는 '큰형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전체 장교의 1%, 정규육사 출신의 5%(매년 200명의 졸업생 중 10여명)에 불과한 이들은 형님은 아우를 끌어 주고 아우는 형님을 밀어 주는 호혜적 관계를 형성하고 회원들끼리 '자리 물리기'를 되풀이함으로써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랐다.

(3) 윤필용 사건

1970년대에 들어와 하나회 세력은 더욱 커졌다. 1973년 1월 전두환은 손영길, 김복동, 최성택과 함께 육사 11기생으로서는 처음으로 별을 달았다. 2월 초 전두환은 손영길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이 베푼 만찬에 초대받아 크라운 4기통 세단 승용차와 금일봉을 하사받았다. 뒤이어 노태우와 정호용도 준장으로 진급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들에게 '一心'(일심)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지휘봉을 하사하였다. 핵심 멤버들이 장군으로 진급함으로써 하나회는 군부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떠올랐다.

하나회 세력이 커지자 선배 장교들도 하나회를 지원하는 측과 견제하는 측으로 나누어졌다. 윤필용(尹必鏞) 수경사령관, 박종규(朴鐘圭) 경호실장,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 서종철(徐鐘喆) 국방장관, 차규헌(車圭憲) 2군사령관, 진종채(陳鍾埰) 보안사령관, 유학성(兪學聖) 3군사령관, 황영시(黃永時) 육군참모총장, 김시진(金詩珍) 헌병감 등이 이들을 지원하였다. 특히 윤필용 장군은 같은 경상도 출신의 하나회 후배들을 적극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하나회의 대부(代父)라고 불렸다. 반면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 강창성(姜昌成) 보안사령관, 정승화(鄭昇和) 장군 등은 하나회 세력을 견제하려 하였다. 이러한 세력다툼의 과정에서 1973년 '윤필용 사건'과 '보안사 휘발유 유용 사건'이 발생하였다.

1973년 4월의 '윤필용 사건'은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노쇠했으니 물러나시게 하고 후계자는 이후락(李厚洛) 형님이 해야 한다"는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윤필용과 그를 따르던 하나회 후배들이 쿠데타를 모의한 죄로 대거 구속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손영길, 권익현, 신재기 등 장교 10명이 구속되었고, 안교덕, 정동철, 배명국, 박정기, 김상구, 정봉화 등 31명이 예편되었으며, 24명이 인사이동 그리고 160여명이 감시대상으로 분류되었다. 또한 민간인으로서 육사 11기와 가깝게 지내던 이원조(李源祚) 제일은행 차장이 해직되고, 윤필용 장군과 가깝게 지내던 김연준(金連俊) 한양대 총장 겸 대한일보 사장이 구속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후계자로 거명되었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도 초조한 마음에 '김대중 납치 사건'을 벌였다가 해임되었다. 유신 직후의 어수선한 사회분위기에서 윤필용이 박정희에 관해 불만을 토로한 것은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 사건은 병력동원과 같은 구체적 거사계획을 잡은 것은 없기 때문에 쿠데타 모의라고까지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강창성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비영남파 세력이 군부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하나회를 상대로 집요한 수사를 벌임으로써 결과적으로 커다란 정치적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 표 3-6 ] 출신지역별 하나회 회원 명단




노태우 (대구), 정호용 (대구), 김복동 (청송), 안교덕 (울진), 박세직 (칠곡),
정동철 (칠곡), 최세창 (대구), 오한구 (봉화), 윤태균 (청송), 황진기 (대구),
조명기 (대구), 우경윤 (예천), 권영휘 (의령), 이종구 (대구), 정도영 (문경),
박정기 (대구), 신우식 (문경), 김상구 (상주), 이대희 (예천), 권병식 (영일),
송응섭 (대구), 김정룡 (문경), 허화평 (포항), 이현우 (대구), 성환옥 (영천),
김정헌 (대구), 김재창 (대구), 서완수 (대구), 노석호 (대구), 허청일 (경산)

전두환 (합천), 권익현 (산청), 최성택 (부산), 손영길 (울산), 박희도 (창녕),
황인수 (사천), 정동호 (의령), 신재기 (창녕), 배명국 (진해), 신말업 (울주),
정순덕 (충무), 최평욱 (남해), 김진영 (충무), 허삼수 (부산), 이학봉 (부산),
구창회 (진주), 조남풍 (부산), 안병호 (진주)
서 울 노정기, 장기오, 최웅, 이우재, 이철희, 민병돈, 정만길,이문석, 장석규
충 청 도 박준병 (충북 옥천), 안필준 (충북 중원), 최문규 (대전),
정진태 (충남 예산), 이춘구 (충북 청원), 이진삼 (충남 부여),
나중배 (충남 예산), 김진선 (충북 괴산)
전 라 도 박종남(전남 목포), 고명승(전북 부안), 장세동(전남 고흥)
강 원 도 장홍열(강원 명주)
이 북 안무혁(황해 안악)


같은 해 8월 이른바 '보안사 휘발유 유용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해임되고, 김귀준 참모장, 이진백 군수참모, 김영환 군수과장, 이동주 소령 등이 구속되었다. 또한 하나회 조사담당이었던 김종진 보안처장과 이대호, 박영선 비서실장 등 20여명의 장교가 예편되었다. 박종규 경호실장도 얼마 후 해임되었다. 이 사건은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영남파 세력이 강창성에게 가한 일종의 반격작전이었다. <표 3-6>과 같이 하나회 회원의 70%가량이 경상도 출신이었다. 이들은 하나회에 대한 1단계 수사에 이어 2단계 수사가 시작되려 하자 위협을 느끼고 "강창성이 경상도 출신 장교들의 씨를 말리려 한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또한 진종채 수경사령관은 경상도 장군을 대표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강창성 보안사령관의 교체를 강력히 건의했다.

결국 이 두 사건을 통해 영남파의 보스(boss)였던 윤필용과 이들을 견제하려 했던 비영남파의 강창성이 모두 타격을 입고 예편함으로써 양자의 싸움은 승자 없는 싸움으로 끝나고 말았다.

1973년의 두 사건은 박정희와 전두환 모두에게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안겨 주었다. 19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하여 장기집권을 꾀하던 박정희는 군부 내 실력자인 윤필용과 강창성을 동시에 제거함으로써 쿠데타 가능성을 없애고 권력기반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또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박종규 경호실장을 제거함으로써 중간보스들의 전횡을 막고 친정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전두환도 이 사건을 계기로 하나회의 주도권을 확고히 잡고 권력의 정점을 향해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그가 하나회 회장이면서도 이 사건에 연루되지 않고 수사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었던 것은 윤필용의 약점과 비리에 관해 박정희에게 직접 중요한 제보를 했고, 또한 박종규 경호실장의 특별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라이벌인 손영길이 구속됨으로써 전두환은 하나회와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의 보스로서 확고부동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중간보스들이 제거된 권력의 빈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피라미드 조직의 정상을 향해 바짝 다가갈 수 있었다. 많은 수의 하나회 회원들이 구속 또는 예편당하는 위기를 겪었지만, 핵심 멤버인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이 이 사건에 연루되지 않음으로써 하나회는 그 명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하나회는 이미 윤필용 장군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자립적인 조직으로 성장해 있었다.

(4) 권력 피라미드의 구조 변화

1970년대 중반 이후 박정희와 전두환의 호혜적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박정희는 육사 8기의 윤필용, 강창성 등에 비해 나이도 어리고 세력도 크지 않아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은 육사 11기 장교들을 총애하고 적극 후원하였다. 전두환은 선배 장교들에 대항해 자신의 세력을 보호하고 지원해 줄 강력한 후견세력으로서 박정희를 필요로 하였다. 양자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공생관계로 결합되었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관계는 단순한 직책상의 상하관계 이상이었다. 이들은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처럼 친밀했는데, 심지어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자(養子)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1961년 5.16 직후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전두환과 하나회 장교들은 박정희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쳤고, 그 대가로 박정희는 전두환과 하나회 장교들에게 진급과 보직상의 특혜를 베풀었다.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중간보스들이 몰락함으로써 박정희와 전두환의 정치적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그림 3-3>과 같이 "박정희-윤필용-전두환"으로 이어지던 권력 피라미드 구조는 이 사건 이후 "박정희-차지철-전두환"의 구조로 변화되었다. 전두환은 이전까지 자신을 보호하고 후원해 주던 윤필용이 제거되자 새로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임명된 차지철(車智澈)을 통해 보호와 후원을 받게 되었다.

1976년 전두환은 차지철의 추천으로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근무하게 되었다. 전두환과 차지철은 서로 밀고 당겨 주는 호혜적 관계로 결합되었다. 전두환은 차지철을 통해 각종 진급과 보직에서 특혜를 받을 수 있었고, 차지철은 전두환을 통해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장악, 통제할 수 있었다. 전두환은 차지철을 만나 인사청탁을 자주 했는데, 동생 전경환(全敬煥)이 경호처 경호관으로 발탁된 것도 전두환의 인사청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차지철에게 "제 동생 경환이가 내근 부서인 정보처에 있는데, 충성심이 강하고 유도도 잘 하니 경호원을 시키면 잘 할 겁니다. 선처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차지철은 각종 인사청탁을 들어 주는 대가로 전두환을 통해 하나회 인맥과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통제하려 하였다.

"차실장은 하나회 회장이었던 전두환 작전차장보가 동기나 군 후배들을 소개하면 이들을 격려하는 것을 즐겼어요. 주로 별을 달고 야전지휘관으로 나가는 후배들이 인사차 경호실로 전씨를 찾아오면, 전씨는 이들을 실장방으로 데리고 가 소개시켰죠. 차실장은 이들에게 금일봉과 함께 '경호실 증정'이라고 새겨진 지휘봉을 주곤 했는데, 군 후배들은 이를 더없는 영광으로 여겼죠."

1960년대-70년대 초 윤필용이 하나회 후배들을 후원해 준 것처럼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차지철이 하나회 인맥을 이끌어 주고 지원하였다. 마찬가지로 전두환은 윤필용에게 바치던 충성과 지지를 차지철에게 바쳤다.

그러나 1970년대말에 들어와 차지철과 전두환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차지철이 권력의 2인자로서 부통령 행세를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차지철을 견제하기 위해 전두환을 지지, 지원하였다. 하나회 세력이 커지자 차지철도 전두환 그룹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차지철과 전두환의 관계는 협조관계에서 경쟁관계로 변화되었다. 전두환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있을 때 내가 계속 나가겠다고 했어요. 차지철과 내가 사이가 나빴어... 차지철이가 여러 가지 일을 비뚤어지게 해. 중령으로 예편하고 국회의원을 한 사람인데, 경호실장 하면서 꼭 국회의원을 상대하고 높은 장군을 경호실에다 데려다 놓아. 차지철이가 나한테 경호실장 자리 뺏길까 봐 굉장히 신경쓰는 것 같애. 내가 내보내 달라고 했어."

결국 전두환은 1978년 대통령 경호실을 떠나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경호실 작전차장보 자리를 떠나면서 자신의 후임으로 노태우를 추천했다.

1979년 3월 전두환은 박정희의 특별 배려로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그는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 김계원(金桂元) 비서실장과 함께 박정희를 둘러싼 핵심 측근 네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전두환의 부상과 함께 그가 키워온 사조직 하나회의 세력도 커졌다. 육군본부 특명검열단에 있던 허화평(許和平) 대령이 보안사 비서실장에, 허삼수(許三守) 수도군단 보안부대장이 인사처장에 임명되는 등 많은 하나회 후배들이 보안사로 진출하여 요직을 차지하였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이 됨으로써 차지철의 후원을 받는 수혜자의 처지에서 벗어나 경쟁자의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전두환 중심의 하나회 세력은 1960년대에는 당대의 세도가 윤필용 수경사령관의 도움을 받아, 그리고 1970년대에는 권력의 2인자 차지철 경호실장의 후원을 받아 성장하였다. 이 세력은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2인자 그룹이 제거되자 박정희와 더 가까와진 것과 마찬가지로, 1970년대말에는 차지철의 후원을 받지 않고도 직접 박정희와 호혜적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1960-70년대의 기간 동안 전두환과 하나회는 권력 피라미드의 구조 변화가 있을 때마다 한 걸음씩 권력의 최정상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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