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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논문




제4장 제5공화국과 하나회 인맥

제1절 1979-1980년 신군부의 등장

(1) 10.26과 합동수사본부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 17년의 역사가 끝나고 새로운 정치정세가 조성되었다. 전두환(全斗煥)과 하나회는 그 어느 정치세력들보다도 신속히 이 사건에 대처함으로써 이후의 정치국면을 주도해 나갈 수 있었다.

10.26사건 직전에 박정희 대통령 주변에는 2인자들간에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권력다툼은 2인자들끼리 서로 견제시키고 충성경쟁을 벌이게 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안정시키려 했던 박정희식 용인술(用人術)의 결과였다. 2인자들 중에서도 특히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세력이 강했는데, 10.26 직전에는 차지철의 세력이 더 강한 상태였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이라는 공식 직책에도 불구하고 차지철의 견제를 받아 3월부터 10월까지 단 한 차례도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모든 정보채널은 차지철에 의해 사전에 파악되고 차단되었다.

10월말 전두환은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金桂元) 비서실장 등 박정희 주변 2인자들간의 역학관계를 분석하고, 이들을 제거할 것을 주장하는 중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는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권력다툼이 극도에 달해 자칫 대통령이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특별 면담을 신청하였다. 그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사실은 10월 26일 돌아가셨지만 10월 27일에 내가 보안사령관으로서 보고를 하도록 돼 있었어. 내가 보안사에 가서 권력주변을 보니 박 대통령 주변이 형편이 없어. 김재규, 차지철, 정당관계 암투가 있어 박 대통령이 상당히 위험할 것 같았어. 두툼한 보고서를 만들었어... 보안사에서도 진종채 사령관이 가면서 나한테 보고서를 내지 말라고 했어요. 내면 죽는다고 하면서. '그러면 누가 박 대통령을 깨우쳐 주느냐' 내가 노재현 국방장관에게도 얘기했어. 비서실 내부도 엉망이고 우군 싸움이 김일성이와의 싸움보다 더 심해. 망하려니 그런가 봐. 그래서 내가 10월에 들어가서 최광수 의전수석을 보고 10월 27일쯤 보고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어. 몇 번이나 읽어 보고 연습도 하고 보고준비를 다 했었는데 박 대통령이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결국은 이렇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했어."

사건 당시 청와대 경호실, 중앙정보부, 대통령 비서실 등 주요 권력기관에서는 사건의 정확한 진상을 몰라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 노재현(盧載鉉) 국방장관,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 이어지는 군 지휘계통에서는 신속히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전두환은 10.26사건을 마치 예견이나 한듯이 신속한 대응을 취하였다. 그는 밤 11시경 국방부 보안사 부대장실에서 김재규 체포 및 호송 작전에 참여하였고, 새벽 2시경 33헌병대를 보안사 직속부대로 배속받아 궁정동 안가로 진입, 경비원들을 무장해제시키고 현장을 접수하였다. 27일 오전 계엄공고 제5호에 따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국내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통제할 수 있는 합동수사본부(약칭 합수본부)를 설치하고 그 장(長)이 되었다. 이로써 그는 권력의 공백기에 모든 정보를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군부와 민간인에 대한 일체의 수사지휘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아침 8시 30분 그는 보안사 회의실에 각 수사정보기관의 책임자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보안사가 박정희 대통령 살해사건의 수사 책임을 맡게 되었음을 통고하고 중앙정보부의 권한과 기능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매일 오전 8시와 오후 5시 두 차례에 걸쳐 수집된 모든 정보를 합수본부에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이 모든 것이 사건 발생 13시간만에 취해진 조치들로서, 너무나 완벽한 대응이었다.

10.26 직후의 합수본부는 단순한 수사전담기관이 아니라 하나의 권력기관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림 4-1>과 같이 합수본부는 중앙정보부, 검찰, 경찰, 보안사, 군검찰, 헌병 등 국내의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장악하고, 3실 3처 1단의 조직구성에 약 5백명의 요원을 망라한 방대한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출신 기관별로 살펴 보면 <표 4-1>과 같이 보안사 출신이 379명으로서 76%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합수본부는 보안사가 다른 수사정보기관들을 장악하기 위해 만들어 낸 임시기구에 불과했다. 합수본부의 권한이 커지자 경찰, 행정관료, 정치인, 기업인, 군 장성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합수본부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합수본부 비서실로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보를 얻으려고 기웃거리는 장교들이 모여들기도 했습니다. 관료들도 합수본부의 통제를 자청해 와서 우리는 본의 아니게 행정적인 일이나 정치적인 일에 간여하게 되었습니다. 경찰도 합수본부에 예속을 자원해 오고 있었습니다. 자석에 빨려들듯이 합수본부로 저절로 힘이 쏠리고 있었습니다."

합수본부의 권한이 커지자 미국측에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특별히 주목하기 시작했다. 미 정보기관에서는 한국의 차기 정권을 담당할 사람으로서 최규하(崔圭夏) 국무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수본부장의 세 사람을 꼽고, 최규하는 글라이스틴 주한미대사가, 정승화는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이, 전두환은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이 각각 맡아 빈번히 접촉하였다.

미국측이 평가하기에 최규하가 헌법상에 부여된 권한을 행사하여 실질적인 정치지도자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군부를 자기 편으로 돌려야 하는데, 그는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는 인물로 보였다. 정승화는 계엄령하에서 3권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는 했지만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그 위에 얹혀 있는 것으로 비쳤다. 반면 전두환은 보안사, 중앙정보부, 경찰, 검찰 등 수사정보기관을 완전 장악하고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전두환은 하나회라는 사조직과 함께 합수본부라는 공조직까지 모두 장악함으로써 10.26 이후 권력의 공백 상황에서 누구보다도 유리한 위치에서 권력재편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 표 4-2 ] 10.26 이후 주요 사건 일지


79-80년 주 요 사 건
10. 26 박정희 대통령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사망
12. 12 전두환 보안사령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
12. 21 최규하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
4. 14 전두환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겸임 발령
4. 21 강원도 사북탄광 노동자 파업
5. 15 전국 대학생 연일 대규모 시위
5. 17 비상계엄 전국으로 확대
5. 18 광주민주화운동
5. 27 계엄군 광주시위 유혈진압 (사망자 174명 발표)
5. 31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발족 (상임위원장 전두환)
6. 1 중앙정보부 요원 300명 숙정
6. 24 김종필 모든 공직 사퇴
7. 10 고급 공무원 243명 숙정
7. 15 일반 공무원 4,760명 숙정
7. 19 전직 장관 및 국회의원 17명 연행
7. 31 정기간행물 172개 등록취소
8. 13 김영삼 정계은퇴
9. 1 전두환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
9. 17 김대중 사형선고
10. 22 제5공화국 헌법 국민투표 실시
10. 27 국가보위입법회의 발족
11. 12 정치활동규제자 811명 발표
11. 14 언론기관 통폐합
12. 1 민주한국당 창당발기인대회
12. 2 민주정의당 창당발기인대회
12. 6 한국국민당 창당발기인대회


(2) 12.12와 군부의 세대교체

10.26 이후 한국정치의 진로는 세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재야와 야당이 연합하여 정권을 잡는 경우이고, 둘째는 민간부문과 군부의 힘이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최규하 권한대행이 대통령직을 계속 맡아 수행하는 경우이며, 세째는 군부의 강경파가 무력을 사용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경우이다.

향후 정치진로와 관련하여 군부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과 노재현 국방장관 등 군 수뇌부는 최규하 권한대행을 대통령으로 옹립하고 군부와 민간부문의 힘이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점진적인 민주화를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소장군부는 군이 정치에 적극 개입하여 구악(舊惡)을 일소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창출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양자간의 의견대립이 심각한 단계에 이른 12월 초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소장군부는 무력을 동원하여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하는 12.12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로써 10.26 이후 한국정치의 진로는 민간정부의 출범이 아니라 군부정권 연장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2.12사건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잡기 위한 일종의 파당적 쿠데타에 해당한다. 이 사건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회 장교들과 그 영향력 아래에 있는 정규육사 출신 소장군부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무력을 동원하여 정승화 계엄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등 상급 장교들을 체포, 연행하고 군의 주도권을 잡은 하극상(下剋上) 사건이다. 1961년 박정희의 5.16쿠데타와 마찬가지로 이 사건도 군부 내 상층과 중하층의 단절과 대립이 심화된 상황에서 발생했다. 당시 상황에 관해 주한미군의 한 정보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우리는 정규육사 출신 장교단과 선배 육사 출신 사이에는 단층선(fault line)이 있다고 보았다. 군부에 이런 단층선이 있을 때 외부적 환경이 조성되면 변란이 생길 수 있는데 (1961년의: 인용자 주) 5.16쿠데타가 그런 경우였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단층선 위에 있는 비정규육사 출신의 상층부만 통제할 뿐, 단층선 아래에 있는 정규육사 장교단이라는 중추부를 컨트롤(control)하지 못하고 있어 불안전한 상태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부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군의 세대교체작업은 정승화와 김재규 인맥을 제거하고 전두환 중심의 하나회 인맥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 작업은 전두환, 노태우,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 김윤호 장군으로 구성된 '6인 군사위원회'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작업으로 12월 19일 구세대에 속하는 약 40여명의 장성들이 강제 퇴역당했다. 반면 12.12에 적극 참여했던 유학성 국방차관보는 3군사령관으로, 황영시 1군단장은 참모차장으로, 차규헌 수도군단장은 육사교장으로, 노태우 9사단장은 수도경비사령관으로, 김윤호 교육사령부 부사령관은 1군단장으로, 백운택 방위사단장은 9사단장으로, 정호용 향토사단장은 특전사령관으로 각각 승진하였다.

군과 같은 위계적 조직에서 12.12와 같은 하극상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회와 같은 비밀사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군부 내에 단층선이 형성되어 상층과 중하층의 단절과 대립이 심화되어 있었다고 할지라도 하나회와 같이 군의 공식적 지휘계통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비밀결사조직이 없었다면 쿠데타는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나회 소속 장교들과 이들의 영향을 받은 많은 수의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이 육군본부의 진압명령에 따르지 않고 전두환의 신군부측을 지지하거나 최소한 중립을 지킴으로써 12.12쿠데타는 성공할 수 있었다.

당시 상황에 관해 미 8군의 한 정보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비정규육사 출신 장성들이 육본을 지지하려고 해도 정규육사 출신 대령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정규육사 출신들은 상층부의 비정규육사 출신들 때문에 진급이 늦어지고 있는데 대해서 불만이 쌓여 있었고, 능력이 떨어지는 그들 밑에서 수모를 당해 왔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의 엘리트 의식과 선배 장교들에 대한 불만이라는 공통된 요구에 기반하여 1963년 결성된 하나회는, 16년이 지난 1979년 마찬가지 이유에서 12.12쿠데타를 일으키는 데 주역을 담당했다.

<그림 4-2>와 <표 4-3>과 같이 12.12 당시 병력을 동원한 많은 수의 장교들은 1963년 결성되어 박정희 대통령의 후원을 받으며 비밀리에 성장해 온 하나회 조직의 회원들이었다.

[ 표 4-3 ] 12.12사건 참가자 명단

성 명 직 책 계 급 육 사 하나회
전두환 보안사령관 소장 11기
정도영 보안사 보안처장 준장 14기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   15기
허화평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대령 17기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 대령 17기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 중령 18기
우국일 보안사 참모장 준장    
차규헌 수도군단장 중장 8기  
황영시 1군단장 중장 10기  
노태우 9사단장 소장 11기
정호용 50사단장 소장 11기
백운택 71방위사단장 준장 11기
박준병 20사단장 소장 12기
박희도 1공수여단장 준장 12기
장기오 5공수여단장 준장 12기
최세창 3공수여단장 준장 13기
송응섭 9연대장 대령 16기
이필섭 9사단 29연대장 대령 16기
구창회 9사단 참모장 대령 18기
안병호 29연대   20기
이상규 2기갑여단장 준장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중장 8기  
정동호 청와대 경호실장 대리 준장 13기
고명승 청와대 경호실 작전과장 대령 15기
우경윤 육본 범죄수사단장 대령 13기
성환옥 육본 헌병감실 기획과장 대령 18기
이종민 육본 헌병대장 중령    
박희모 수경사 30사단장 소장    
장세동 수경사 30경비단장 대령 16기
김진영 수경사 33경비단장 대령 17기
김진선 수경사 33경비단   19기
최석립 수경사 33헌병대장 중령    
조 홍 수경사 헌병단장 대령    
신윤희 수경사 헌병부단장 중령 21기


위의 표와 같이 12.12사건에 참가한 것으로 밝혀진 34명의 장교들 중 하나회 소속은 24명으로서 약 70%에 해당한다. 게다가 차규헌(車圭憲), 유학성(兪學聖), 황영시(黃永時) 등은 하나회 회원은 아니었지만 예전부터 꾸준히 하나회를 후원해 온 장군들이었다. 이들은 보안사와 서울 근교의 9사단, 20사단, 71사단, 공수부대, 그리고 청와대, 수경사, 육군본부, 국방부 등 군부의 요소요소에 포진해 있다가 12월 12일 밤 전두환의 연락을 받고 쿠데타에 가담하였다.

이 날 진압에 앞장섰던 장태완(張泰玩) 수도경비사령관은 하나회 인맥이 반란을 주도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전군에 출동준비를 지시했다. 정병주(鄭柄宙) 특전사령관, 윤성민(尹誠敏) 육군참모차장, 이건영(李建榮) 3군사령관 등도 초기에는 강제 진압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모두 정규육사 출신이 아니며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신임을 받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중하층 병력을 장악하고 있는 지휘관들 중 대다수가 정규육사 출신으로서 하나회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쿠데타 군의 서울 진입을 막아야 할 수도경비사령부 안에도 장세동(張世東), 김진영(金振永), 김진선(金鎭渲) 등 하나회 소속 장교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 결과 이들의 진압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12.12사건을 계기로 하나회 인맥은 군의 주도권을 완전 장악하고 군부의 세대교체를 이루어 내었다. 1980년 이후 이들은 승진을 거듭하여 <표 4-4>와 같이 대장 18명, 중장 20명, 소장 13명, 준장 9명 등을 배출하였다.

[ 표 4-4 ] 최종 계급별 하나회 회원 명단

대 장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박희도, 박준병, 안필준, 최세창, 정진태, 이종구, 이진삼, 고명승, 나중배, 송응섭, 신말업, 김진영, 이문석, 구창회, 이필섭
중 장 김복동, 최성택, 장기오, 황인수, 정동호, 윤태균, 최문규, 이대희, 권병식, 민병돈, 장세동, 최평욱, 정만길, 김태섭, 조남풍, 김정헌, 김재창, 서완수, 김진선, 안병호
소 장 노정기, 박세직, 조명기, 권영휘, 정도영, 신우식, 장기하, 김정룡, 이현우, 최윤식, 최석림, 장석규, 김무웅
준 장 손영길, 이우재, 안무혁, 이춘구, 정순덕,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성환옥
대 령
이 하
권익현, 안교덕, 정동철, 신재기, 황진기, 오한구, 우경윤, 박종남, 허청일, 박정기, 배명국, 노석호, 정봉화


(3) 5.18과 국보위

1980년의 봄은 민주화 열기가 분출되던 시기였다. 야당과 재야, 노동자, 학생 등은 계엄철폐를 요구하며 연일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4월 21일에는 강원도 사북탄광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고, 5월 15일에는 서울역 광장에 10만여명이 모이는 등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대해 신군부는 무력을 사용하여 강경진압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5월 18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광주시내에 계엄군을 투입하였다. 이로써 정국은 군부와 반대세력간의 정면대결의 양상으로 치달았다.

신군부의 정국대응은 두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기존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을 연행하거나 그 활동을 제한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날로 격화되는 계엄철폐 시위를 무력을 동원하여 억누르는 것이었다. 신군부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양보책을 쓸 수도 있었지만, 일단 무력으로 제압한 이후에 점진적인 유화책을 쓰기로 하였다.

5월 18일 계엄사령부는 김대중(정치인), 김종필(공화당 총재), 이후락(국회의원), 박종규(국회의원), 문익환(목사), 김동길(연세대 부총장), 이영희(한양대 교수) 등 26명을 부정축재 및 사회혼란조성 혐의로 연행하고, 24일 대통령살해사건과 관련해 사형이 확정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박선호 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등 5명에 대한 교수형을 집행하였다.

5월 27일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계엄군을 투입하였고, 이 과정에서 2,000여명의 민간인이 희생되는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계엄확대조치에 동원된 군 병력은 공수특전단, 20사단, 해병사단 등 2만 5천여명이었는데, 광주에 투입된 부대는 공수 7여단의 33대대와 35대대였다. 공수특전단은 1971년 전두환이 제1공수특전단장으로 근무한 이래, 1974년 노태우가 공수특전여단장으로, 같은 해 정호용이 공수여단장으로, 그리고 1977년부터 최세창(崔世昌)이 공수특전여단장으로 근무한 곳으로서, 하나회 회원들끼리 자리 물리기를 해 오던 대표적인 부대였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는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를 발족시켰다. 국보위는 명목상 최규하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고 있었지만, 실질적 권한은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으로 있는 상임위원회에 있었다. 국보위원의 인선작업은 보안사의 권정달(權正達) 정보처장, 허화평(許和平) 비서실장, 허삼수(許三守) 인사처장, 이학봉(李鶴捧) 대공처장 등에 의해 보안사 안가에서 은밀히 이루어졌다. 국보위는 당연직과 임명직을 포함하여 총14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상임위원급 이상 52명 중에서 군 출신이 30명으로 57%를 차지하였다.

[ 표 4-5 ] 하나회 출신 국보위원

성 명 직 책 육 사 이후 주요 경력
전두환 상임위원장 11기 제11, 12대 대통령
노태우 상임위원 11기 내무장관, 민정당대표위원, 대통령
정호용 상임위원 11기 육군참모총장, 국방장관, 국회의원
이춘구 사회정화위원 14기 국회의원, 내무장관, 민정당사무총장
안무혁 건설위원 14기 국세청장, 안기부장
민병돈 내무위원 15기 특전사령관, 육사교장
최평욱 운영위원 16기 보안사령관, 철도청장
허삼수 사회정화위원 17기 대통령사정수석비서관
서완수 사회정화위원 19기 특전사령관, 기무사령관


<표 4-5>에 나타난 바와 같이 하나회 출신 인사들은 국보위에 들어가 적극 활동하였다. 상임위원회에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의 세 사람이 참여하였다. 국보위 각 분과 중에서도 특히 많은 역할을 했던 사회정화위원회에는 이춘구(李春九), 허삼수(許三守), 서완수(徐完秀) 등이 참여하였다. 국보위에 참여했던 각계 인사들은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장관, 국회의원, 청와대 등 요직으로 진출했다.

국보위는 "부정부패, 부조리 및 각종 사회악을 일소하여 국가기강을 확립한다"는 취지 아래 대대적인 숙정작업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2급 이상 공무원의 12.1%인 243명, 일반 공무원 4,760명, 국영기업체 임원의 23%인 176명이 숙정되었다. 6월 4일부터 7월 31일까지 2개월에 걸친 정화작업으로 입법부 11명, 사법부 61명, 행정부 5,418명 등 공직자 5,490명과 국영기업체, 금융기관 및 정부산하단체 등 127개 기관 임직원 3,111명 등 총 8,601명이 공직 또는 관련직에서 물러났다. 또한 7월 19일 전직 장관 및 국회의원 17명이 연행되었고, 7월 31일 정기간행물 172개의 등록이 취소되었다. 신군부 세력은 이른바 '3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6월 24일 김종필을 모든 공직에서 사퇴시키고, 8월 13일 김영삼을 정계은퇴시켰으며, 9월 17일 김대중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와 함께 11월 12일 구세대 정치인 811명을 정치활동규제자로 선정하여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국보위 산하 사회정화위원회는 8월 4일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를 단행하고, 11월 27일까지 4개월에 걸쳐 폭력배, 공갈사기배, 밀수마약사범 등 사회풍토문란자 총 5만 7,561명을 검거하고, 이들 중 66%에 해당하는 3만 8,259명을 군부대순화교육 대상자로 분류하여 이른바 삼청교육(三淸敎育)을 받게 하였다. 삼청교육 대상자 중에는 정치인, 재야인사, 광주시위 관련자, 대학생, 종교인 등 시국사범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신군부 세력의 주도로 진행된 공직자 숙정 및 사회정화운동은 구시대 정치세력을 청산하고 새로운 정치인맥을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이 숙정작업으로 신군부 세력에 대해 비우호적이었던 많은 수의 민간정치인들이 정치무대에서 사라졌다. 또한 하나회와 대립관계에 있던 비육사 출신 장교들이 대거 강제 예편당했다. 심지어 1973년 윤필용 사건의 수사책임을 맡아 하나회 소속 장교들을 구속했던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은 7월 21일 계엄군에게 연행되어 2년 6개월간 복역하면서 가혹한 삼청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반면 하나회의 대부로 알려진 윤필용 전 수경사령관은 1980년 도로공사사장을 맡는 등 후배들로부터 과거의 은혜에 대한 보답을 받았다. 또한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강제 예편당했던 많은 수의 하나회 출신 인사들이 새롭게 정계와 국영기업체의 요직에 등용되었다. 하나회 창립 멤버였던 권익현은 윤필용 사건으로 예편한 후 삼성정밀 전무를 지내다가, 육사 11기 친구들의 배려로 7월 26일 제2무임소 장관 보좌역에 임명되었다.

1979-80년 권력의 공백기에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 세력은 10.26, 12.12, 5.18 등 역사적 사건을 거치면서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제5공화국 창출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들이 군 상층부와 야당을 비롯한 민주화 세력 들의 완강한 반대와 저항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회와 같이 내적 결속력이 높은 비밀사조직을 통해 오랫동안 서로 밀고 당겨 주는 후견인-수혜자 관계로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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